샘교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기부
자본주의 끝판왕의 나라에서 받은 자본주의 답지 않은 인상들
길에서 아무 행인을 붙들고 미국이란 나라에서 떠오르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요청하면 자유, 천조국, 할리우드, 이민자 등의 키워드가 나올 것이다. 내가 만약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과거 직업의 영향으로 자본주의를 떠올릴 것 같다. 과거 일을 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미국 혹은 미달러가 차지하는 위상을 매일 느끼고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세대가 주로 쓰는 상품과 서비스의 상당부분은 미국회사가 만들고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 마저도 노동이란 이름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을 위한 투입요소로 보며, 개인이 가진 능력과 부의 크기로 나의 가치가 산정되는 자본주의 끝판왕 미국이란 나라에 처음 오기로 결정했을 때, 어떤 특출한 능력도 없고 수중에 몇 푼 밖에 없었던 내가 느꼈던 걱정과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차가운 이미지는 시애틀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민자들이 많은 서부라 그렇겠지만 석사과정에 다니는 2년간, 그리고 회사 다니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차별이나 멸시를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뭔가 하고자 할 때 모두들 자기 일 마냥 도와줬으며, 본인이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면 아는 사람이라도 소개시켜 주었다. 한국을 정이 많은 나라라고 하지만, 미국사회에서 느낀 정이란 감정은 그 양과 질에 있어 한국사회 못지 않다.
비영리 단체의 순기능
3년 전 꿈과 희망만 가지고 시애틀에 처음와서 샘교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분이 나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얼마나 바꿔줄지 예상하지 못했다. 샘교수님은 City University of Seattle이라는 대학교에서 컴공학부 학장을 맡고 계신 한국계 미국인이신데, 첫 만남에서 두시간 가량의 이야기 만으로도 일반적인 사람이 아님이 느껴졌다. 또한 개발자 혹은 데이터 분야로 가고 싶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나에게 명확한 청사진/계획을 제시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비영리 단체에서의 활동이었다.
한국사회에선 권위가 중요하지만 미국에서는 경험이 더 중요하며, 한국에선 부(현재가치)에 더 많은 가중치를 두는 반면 미국에서는 개인의 능력(미래가치)을 더 비중있게 생각한다. 샘교수님이 당시에 돈(부)없고 백(권위)없는 나에게 추천해주신 것이 비영리 단체에 들어가서 웹사이트를 만들고 관리해주면서 경력 쌓으라는 것이었다. 비영리 단체 대부분이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행사를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해야 하는 공통적인 고민이 있었고, 온라인 전환을 돕다보면 자연스레 테크니컬 스킬이 쌓이고 법인에서 일을 한 것이라 향후 내 경력 증명 시에도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미한인과학자협회(KSEA) 시애틀 지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여러가지 개발 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개발 지식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샘교수님 제자들이랑도 친해졌고, 같이 고생하다보니 전우애가 많이 쌓였다. 그당시에 고생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구글, 아마존, 어도비 등 미국의 대표 테크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내가 그들 중 가장 마지막에 취업이 되었는데 취업전 추천서도 써주고 모의면접도 같이 봐주는 등 정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이 때문에 종종 그때 같이 고생했던 친구들이 생각나고 며칠 전 생일이었을 때도 생각이 나 문자를 보냈었다.
3년간 쌓인 마음의 빚
샘교수님과의 인연은 사실 이 한 글로는 다 담을 수 없다. 샘교수님은 사실상 시애틀에서 나의 부모님 역할을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업이 된 이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샘교수님께 보답을 하고 싶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샘교수님이 재직 중인 학교에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고, 오늘 점심시간에 아마존 본사 앞에서 만나서 check을 전달하고 같이 점심식사를 하였다. 학생 때는 항상 얻어 먹었지만 이제 회사 다니면서 돈을 벌기에 오늘은 내가 밥을 사드렸고, 앞으로도 샘교수님의 식사자리는 내가 지불할 것이다. 너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렇게나마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것 같다.
미국회사는 직원들의 기부를 적극 장려하고 있는데, 구글 같은 큰 회사는 내가 기부한만큼의 액수를 회사에서 매칭하여 기부를 한다. 즉, 내가 어느 자선단체에 500불 기부하고 영수증을 첨부하면 구글에서도 해당 단체에 500불을 기부하는 형식이다. 우리회사는 구글만큼 부자회사는 아니어서 연간 최대 500불 매칭 기부를 해준다. 분명 세제혜택이 있기에 이런 제도가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거의 모든 회사가 이런 기부 매칭 프로그램을 만들고 적극 장려하는 모습은 정만 강조하는 우리나라와는 확실히 대비되는 느낌이고, 자본주의 끝판왕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듯 하다.
여기 온 이후로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만 받다가 이제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어 너무 뿌듯했고, 주변을 둘러보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베풀면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