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생일
항상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진 생일의 기억
1986년 5월 15일은 새벽의 고요를 깨우면서 내가 세상의 빛을 처음 본 날이다. 부모님 두분 다 선생님이었다는 사실과 스승의 날이 생일인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것이 우연이건 아니건 86년 5월 15일은 부모님에게 있어 나의 존재는 그 어떤 스승의 날의 선물보다 더욱 더 갚진 것이었으리라. 사실 자라오면서 생일을 그렇게 중요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가족들은 분명 매년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겠지만 돌이켜보면 항상 생일 케익을 받고 생일 파티를 했던 것 같진 않다. 혹은 고등학교 이후로 계속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보니 과거 기억이 흐릿해져서 내가 기억을 못할지도…분명한 것은 대학 진학 이후의 생일은 그저 친구들이 챙겨주길 내심 바라지만 안 챙겨주더라도 크게 섭섭하지 않은 그런 일년 365일 중 평범한 하루일 뿐이었다.
아침 출근 길의 서프라이즈
회사 내 해커톤을 핑계로 지난 주중 내내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다. 재택근무를 하면 1시간 더 잘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하루종일 혼자서 일하면 미팅 시간 외에는 말할 기회가 없어서 외롭고 소외된 느낌이 많이 든다. 사실 회사 간다고 해서 동료들이랑 대화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지만 출퇴근을 하고 캐릭터가 독특한 동료들을 보는 행위 자체가 내가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늘은 이번주 시작이고 특히 생일에 집에 혼자서 낮시간을 보내기는 싫어서 아침에 출근하기로 맘먹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한테서 카톡이 왔다. 무슨 pick up information이라는 생소한 카톡 메세지가 보여 다시 자세히 보니 주변 케익 가게에서 생일 케익을 주문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미국 케익 가게를 찾아 주문을 하다니…이게 가능한지 오늘에서야 알았고, 그 마음과 정성이 너무나 고마웠다.
시애틀로 향하는 550번 버스 안에서도 오늘 이상하게 평소 연락이 뜸하던 친구와 과거 같이 세미나를 들었던 업계 지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링크드인이나 페이스북 등을 통해서 생일이 표시되었던 것 같다. 어쨋건 오랜만에 받은 연락이라 반가웠고 짧은 시간의 카톡임에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 먼지 낀 아무도 보지 않는 쓸쓸한 블로그도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난 날의 회상
생일이라 은근 마음이 들떴나보다. 오늘은 유난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쌓여 있긴 했지만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도 아니었고, 미팅도 두개 중 하나는 취소되어 마음이 더 느슨해졌다. 그러다 이 블로그 글을 보며 작년에 혹은 재작년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나 뒤돌아 보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국에 처음 시애틀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것이 생소하였고 내가 여기서 적응 할 수 있을까란 불안 심리를 가지고 살았던 것이 보였고, 학기 시작하고는 너무 많은 과제에 분노 했었다. 그리고 학교 다니는 내내 인턴과 취업 걱정으로 계속 좇기는 하루하루를 보냈었더라. 미국 석사 오는데 수중엔 5천만원 밖에 없어서 학교 다니는 내내 자금 문제로 전전긍긍 했고, 장학금과 TA, 교내 알바를 하면서 겨우 졸업까지 버틴 기억도 생생하다. 졸업 막판에는 돈 문제 때문에 울기도 하고…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비마다 실질적인 도움과 해결책을 제시해 주신 Sam 교수님과 같이 프로젝트를 했던 돈없고 백없는 그의 제자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늘 친구들에게 감사 메세지를 보냈고, 지난 주말에는 은행에 가서 장학금 기부를 위한 check을 썼다. Sam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식사를 하면서 “이해관계가 없을 때 적극적으로 네트워킹을 해야 이해관계가 생겼을 때 도와준다”는 말씀을 이제 몸소 깨닫게 되었다.
작지만 떠들석한 생일 파티
작년 그리고 재작년 생일에는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 작년에는 졸업을 앞둔 시점이어서 살짝 우울한 감정으로 South Campus Center로 가 LeetCode 문제를 열심히 풀었으리라. 그때의 노력 때문에 지금 엔지니어로서 새 삶을 살고 있기에…오늘은 왠지 혼자서 생일을 보내기 싫었다. 조용한 생일보단 지인과 웃고 떠들고 축하받는 생일을 보내고 싶어 작년에 4개월간 같이 살았던 영태형에게 연락했고, 퇴근 후에는 벨뷰로 이사와서 가장 자주 보는 상윤님과 케익 픽업 및 장을 보러 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케익을 들고 인증샷도 찍고, 개인 고민과 재밌는 이야기도 같이 나누어 간만에 집이 떠들석했다.
반드시 해뜰 날 온다
동료와의 관계, 의사소통, 그리고 엔지니어로서의 전문지식 쌓기 등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들이 내 앞에 있지만, 그간 많은 성장을 이뤄 냈음에 오늘 하루만큼은 내 자신에게 칭찬하고 싶다. 동시에 내가 힘들 때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줬던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다. 1년 후에 내가 어디 있을지 또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새로이 선택하고 주어진 환경이 이젠 덜 두려울 것 같다.